기록이 곧 나의 정체성 – 기억보다 선명한 나만의 아카이브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며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지나칩니다.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마음은 쉼 없이 움직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감정과 생각 중 얼마나 기억 속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은 희미해집니다. 기분 좋았던 일도, 마음을 흔들었던 순간도 어딘가로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기억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붙잡기 위해 기록합니다. 기록은 단순한 메모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의 결을 닮은 선명한 흔적이며,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정체성의 증거입니다. 기억보다 선명한 나만의 아카이브,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기억이 미처 담지 못한 나의 얼굴
기억은 참으로 불완전한 도구입니다. 한때는 선명했던 감정도, 어떤 말투나 표정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집니다. 때로는 왜 그렇게 웃었는지,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도 잊혀집니다. 사람의 뇌는 필요에 따라 기억을 덧칠하고, 때로는 아예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반면 기록은 다릅니다. 단 한 줄의 문장, 하나의 문단 속에는 당시의 나, 그때의 감정과 생각이 살아 숨쉼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 기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였음을 증명하는 조용한 증언이자, 잊히지 않도록 스스로를 세상에 남기는 일입니다.
저는 가끔 오래된 다이어리나 메모장을 펼쳐봅니다. 몇 년 전, 아무렇지 않게 써내려갔던 짧은 문장들 속에는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내’가 있습니다. “오늘은 퇴근길 하늘이 예뻤다. 잠깐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라는 한 줄 속에, 그날의 하늘과 내 마음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기억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그날의 공기, 그 계절의 냄새, 그리고 그때의 내가 고스란히 되살아납니다. 기록은 내가 나를 잊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손길입니다. 기억은 흐릿해져도, 기록은 선명합니다. 그렇게 기록 속의 나는, 어떤 순간에도 흐려지지 않습니다.
기록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말들
우리는 일기장이나 노트 앞에서 솔직해집니다. 사회 속에서 부드럽게 깎여 나간 모서리도, 애써 무시했던 감정도, 기록 앞에서는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기록은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나와 나 사이의 대화를 위해 존재하는 말. 그래서 때로는 서툴고, 투박하고, 문법에 맞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이 오히려 더 진짜 같습니다. 기록을 통해 저는 저에게 가장 진실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특히 감정이 복잡할 때, 저는 기록을 통해 저를 꺼내어 봅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 미처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이 기록을 통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감정은 슬픔일까, 분노일까? 왜 이 일이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게 만드는 걸까?” 이런 질문은 기록 없이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손으로 써 내려가다 보면, 내 마음의 중심에 다가가는 기분이 듭니다. 그것은 나를 해석하는 일이자, 내가 누구였는지를 되짚어보는 일입니다. 그렇게 저는 기록을 통해 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을 쓰는 것,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읽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기록의 힘입니다. 우리는 남기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정직한 말들이 쌓여 하나의 정체성이 됩니다. 그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아주 사적인 나만의 서사가 됩니다.
시간을 관통하는 나만의 서사 구조
기록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한 줄의 이야기로 만듭니다.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지만, 기록을 통해서야 비로소 ‘살아온 삶’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의 글, 한 장의 사진, 몇 줄의 메모가 모이면 그것은 곧 ‘나의 연대기’가 됩니다.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 변해왔고, 무엇을 반복하며 살아왔는지를 기록은 말없이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축적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서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가끔 과거의 기록을 연도별로 정리해보기도 합니다. “2019년에는 이런 생각을 했고, 2021년엔 이런 마음이었다.” 그렇게 바라본 저의 흐름은 의외로 명확했습니다. 어떤 시기는 무너짐의 연속이었고, 또 어떤 시기는 꿈을 꾸던 나날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리듬과 궤도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을 통해서야 비로소 읽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냈고,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좋아했는지. 그 모든 것이 기록이라는 아카이브 안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기록은 단지 과거를 추억하게 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나에게 말을 걸고,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됩니다. “예전에 너는 이런 생각을 했지, 지금도 그것을 소중히 여기니?” “그때의 너는 이렇게 흔들렸지만, 결국은 이겨냈어.” 기록은 시간을 통과해 스스로를 응원하는 방식이 됩니다. 그 말들은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가장 유효한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줄 한 줄 쌓여가는 기록은, 단지 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나를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기록은 존재의 흔적, 그리고 나를 돌보는 습관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흔적을 남깁니다. 어떤 것은 의도하지 않게 남겨지고, 어떤 것은 의도적으로 남기려 애쓴다. 그중에서 스스로의 손으로 남긴 기록은 가장 의식적인 흔적입니다. 그것은 존재의 증거이자, 나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기록이 없었다면 저는 저의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기억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다르게 왜곡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이 쓴 문장, 자신이 남긴 말들은 시간을 거슬러 지금의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것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조용히 대화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기록은 일상의 사소함을 특별하게 만들고, 평범한 날들을 한 장의 연대기로 바꿉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나를 발견하고, 또 돌보게 됩니다. 잘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다. 정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오늘 하루,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쌓인 기록은 어느새 ‘기억보다 선명한 나’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축적된 아카이브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뿌리가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도, 과거의 당신도, 모두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조용히 한 줄 남겨보면 어떨까 바라봅니다. 그 문장이 언젠가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그렇게 기록은, 오늘의 당신을 내일의 당신에게 이어주는 가장 따뜻한 다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