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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정신 건강 – 불안할수록 쓰는 나만의 루틴

by 시골썬 2025. 6. 11.

기록과 정신 건강 – 불안할수록 쓰는 나만의 루틴

기록이라는 작은 닻, 마음의 파도 속에서

 불안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음은 요동치고, 몸은 긴장하며, 눈앞의 사소한 일들이 순식간에 위협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날이면 숨조차 불편하고, 말 한 마디에 괜히 마음이 쿡 찔립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저 역시 마음의 균형이 흔들리는 시기를 자주 겪어왔습니다. 때로는 잠들기 직전의 정적 속에서, 때로는 바쁜 일상 한복판에서 불안은 불쑥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감정들을 외면하려 했습니다. 괜찮은 척, 평온한 척, 아무 일도 아닌 듯 넘어가 보려 했지만, 오히려 그런 회피는 마음의 갈피를 더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무심코 손에 잡힌 노트 한 권이 제 마음의 숨통을 틔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형식도 없이, 단지 "오늘 너무 불안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울고 싶었다"는 문장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기록이 의외로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기록은 감정을 정리하고, 나의 내면을 외부로 꺼내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과 같았습니다. 특히 불안이나 우울이 클수록, 제 안의 생각들은 뒤엉켜 있었고, 머릿속은 복잡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한 줄 한 줄 단어로 적는 과정 속에서 복잡했던 마음은 차츰 구조를 갖게 되었고, 막연했던 감정은 구체적인 이름을 얻었습니다. "나는 외롭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사랑받고 싶다". 기록은 그런 감정들을 정돈하고, 받아들이게 해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안한 나'를 드러내는 것이 곧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기록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감정을 써내려갈수록 저는 제 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고, 그것이 어떤 치유보다 오래 지속되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기록이라는 작은 닻, 마음의 파도 속에서
기록이라는 작은 닻, 마음의 파도 속에서

불안한 날일수록 꺼내는 루틴

 기록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복되는 리듬이고, 나만의 정서적 공간입니다. 제가 만들어낸 루틴은 아주 단순합니다. 매일 밤, 조용한 방에서 차 한 잔을 우려내고, 작은 조명을 켜고, 노트를 꺼냅니다. 그날의 감정을 적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말이 마음에 남았는지를 씁니다. 별일 없었던 날이라도 ‘별일 없었다’는 사실을 적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생겼습니다.

 이 루틴은 불면의 밤에 특히 효과적입니다. 잠들기 전,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수면을 방해하는 생각들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글로 풀어놓으면, 마치 머릿속의 서랍을 하나씩 정리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졌고, 잠을 청하기 쉬워졌습니다. 기록은 단순히 감정을 털어놓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안정을 주는 반복 행위가 되었습니다.

 불안의 정체는 어쩌면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고,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기록은 그런 불안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내면의 혼란이 구체적인 문장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는 거리감이 생깁니다. 이 작은 거리감이야말로, 심리적 회복을 위한 첫 걸음이 됩니다.

 저는 때때로 불안할 때 꺼내 읽는 노트를 따로 보관합니다. 몇 달 전, 아니면 몇 년 전의 제가 써놓은 두서없는 문장들 속에서, 그때의 불안과 고민, 그리고 그걸 견디고 지나온 흔적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도 잘 지나왔구나’, ‘이번에도 결국은 지나가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며 현재의 불안이 조금은 옅어집니다.

 그리고 이 루틴은 계절처럼 변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날은 손글씨가 좋고, 어떤 시기에는 휴대폰 메모장이 더 편하기도 합니다. 글 대신 그림이나 색깔로 감정을 표현하는 날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짧은 문장 하나라도, 그것이 오늘의 나를 담고 있다면 충분합니다.

쓰는 나와 읽는 나, 나를 돌보는 두 사람

 기록은 나와 나 사이의 대화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감정을 토해내는 ‘쓰는 나’와, 시간이 지난 후 그 기록을 다시 마주하는 ‘읽는 나’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불안 속에 있던 순간에는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비관적일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른 후 그 기록을 읽을 때면 차분히 조망하는 제3자의 시선이 생깁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의 회복을 목격하게 됩니다.

 기록은 감정을 변화시키기보다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무조건 긍정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때로는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너무 무기력했다’, ‘왜 살아야 할까 싶었다’는 고백도 적었습니다. 그런 날의 기록을 통해 저는 제 마음의 어둠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 어둠을 무조건 밀어내기보다 곁에 두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건 마치 어두운 밤에 작은 촛불을 켜는 일과 비슷했습니다. 세상을 환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적어도 한 걸음 앞은 보이게 해주는 빛.

 또한 기록은 혼자만의 일이지만, 때로는 누군가와 조심스럽게 나누는 것도 가능합니다.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에 친구에게 기록한 노트의 한 문장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 문장을 통해 저는 설명하지 않고도 제 상태를 알릴 수 있었고, 친구는 그 글로 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감정을 다 담지 못할 때, 기록은 전달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지속적인 기록을 위해 저는 다양한 방법을 병행합니다. 감정 일기를 쓰기도 하고, 불안이 심한 날에는 ‘감정 트래커’를 활용해 시간대별 감정의 흐름을 기록합니다. ‘감정 단어 카드’를 만들어 나의 하루를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고, 가장 힘들었던 날의 마음을 그림으로 옮겨본 적도 있습니다. 그 모든 기록이 모여, 지금의 저를 이루는 조각들이 되었습니다.

 기록은 고요한 저항입니다. 불안을 무조건 이기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태도입니다. 감정은 지나가지만, 기록은 남습니다. 그 흔적은 훗날 나를 다시 일으키는 지지대가 되고, 미래의 나에게 따뜻한 손편지가 됩니다. 그러니 불안한 날일수록, 더 많이, 더 진솔하게 써내려가야 합니다.

 불안과 우울, 불면이라는 이름의 마음의 흔들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루틴’을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루틴이 기록이라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마음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쓴다는 행위는 결국 나를 붙드는 행위이고, 그 글을 다시 읽는 일은 나를 끌어안는 연습입니다.

 당신의 하루에도, 불안한 마음 위에 살포시 얹어질 한 줄의 문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모르게 흘린 눈물처럼 조용하지만, 결국은 견디게 해주는 말들. 그 말들을, 오늘도 기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