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도 괜찮지만, 한 번은 써두고 싶은 이야기들 – 망각을 위한 기록
오늘은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잊고 싶었던 기억, 말하지 못한 마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에 대해 말입니다. 우리는 상처가 되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그 감정 속에 빠져버릴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애써 외면하고, 바쁘게 살고, 조용히 묻어두지요. 하지만 정말로 그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있을까요? 아니면,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어느 날 우리의 발목을 다시 붙잡게 되는 걸까요? 오늘은 바로 그 이야기—‘망각을 위한 기록’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잊어도 괜찮지만, 한 번은 꼭 써두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어떻게 맞이하고 떠나보낼 수 있을지, 그 작고 고요한 용기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라지기 전에 한 번은 써두는 용기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는 듯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어 있는 감정은 의외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특히 끝내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이해받지 못했던 상처들, 혹은 내뱉지 못한 사과나 후회의 말들은 어딘가 마음의 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 고개를 내밉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기억과 감정에 휘둘립니다. 아무 일도 아닌 듯한 하루에 갑작스레 이유 없는 슬픔이 밀려오기도 하고, 오래전의 일이 오늘의 내 기분을 망쳐놓기도 하지요.
저는 그런 날들에 글을 씁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멋진 문장을 남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사라지기 전에, 감정이 나를 잠식해버리기 전에 한 번은 써두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머릿속을 맴돌다가도, 종이 위에 옮겨 놓는 순간 묘하게 가라앉습니다. 때로는 그 기억이 마치 타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다시 떠올려도 덜 아픈 기억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망각을 위한 기록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잊기 위해, 혹은 받아들이기 위해. 단 한 번이라도 그 기억을 나의 손으로 붙잡아 글로 남길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기억과 건강한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정리하고 나면, 더 이상 그 감정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길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각이 됩니다.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의 기록
우리는 늘 좋은 기억만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사진첩에는 웃는 얼굴만 남기고, SNS에는 행복한 순간만 올립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진짜 성장시킨 순간은 언제나 조금 아프고, 고단하고, 혼자였던 때였습니다. 그날의 감정은 어설프고, 때로는 창피하고,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었지요.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나’였고, 그 모든 순간은 내가 살아낸 시간입니다.
기록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예쁘게 포장하지 않고, 정리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분노로 가득했던 날의 글, 억울해서 울었던 새벽의 메모, 쓸쓸해서 한 글자도 쓰기 어려웠던 밤의 흔적들. 그 모든 기록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의 궤적을 만듭니다.
저는 감정이 격해진 날일수록 더 정직하게 기록하려고 합니다. 말로는 끝나지 않는 마음들을 글로는 끝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는 순간은 괴롭지만, 다 쓰고 난 후엔 조금은 홀가분해집니다. 눈물이 흘러도 괜찮습니다. 그런 글들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더라도, 내가 나를 껴안는 방식이 됩니다.
기록은 그래서 하나의 사랑입니다. 타인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사랑. 나를 지우지 않기 위한 애정이고, 내가 살아낸 시간을 버리지 않기 위한 다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적어둔 글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감정은 흐려질지라도, 진심은 기록 속에 남아 나를 다시 지지해줍니다.
잊기 위한 고백, 기억을 받아들이는 방식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을 지우려 합니다. “그때의 나는 아니었어”, “그건 나답지 않았어”라는 말로 부끄럽고 아팠던 순간들을 무효화하려 하지요. 하지만 그 모든 실수와 어리석음도 결국은 나였습니다. 기록은 그 사실을 우리 스스로에게 고백하게 만듭니다.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기억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망각은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사랑했고, 상처받았고, 실망했고,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야 우리는 그 기억을 고요히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외면할수록 감정은 뿌리를 내리고, 감정에 휘둘리게 되지만, 적어두는 순간 우리는 감정과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가끔은 오래된 메모장을 뒤적이다가 내가 쓴 글을 우연히 마주치기도 합니다. 그 글들은 대부분 엉성하고, 문장도 매끄럽지 않으며, 때로는 감정에 휩쓸려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글에서 저는 ‘진짜 나’를 발견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드러냈던 나, 괜찮은 척하지 않았던 내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그 글을 써뒀던 과거의 나에게 조용히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모든 시작은 과거의 연속 위에 있습니다. 과거를 덮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이 진짜 새 출발이 됩니다. 우리는 그저 잊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억을 존중하고,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면, 조용히 써두어야 합니다. 잊어도 괜찮지만, 한 번은 꼭 써두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며
기록을 남긴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습관이겠지만, 저에게는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내 안에서 자라나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고, 때로는 삶 전체를 흐릿하게 합니다. 그러나 글로 옮기는 순간,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나의 편’이 됩니다.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자, 앞으로의 나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입니다.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한 번은 꺼내어 적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해는, 삶을 조금 더 단단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작은 힘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것을 잊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잊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글로 남겨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사랑이자 위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진심을 담아 써봅니다. 잊어도 괜찮지만, 한 번은 꼭 써두고 싶은 이야기들을.